(2026年1月27日更新)
English
Early Nabeshima Ware
The warlord Tokugawa Ieyasu (1543–1616) put an end to Japan’s long century of civil war with his victory at the Battle of Sekigahara in 1600. As part of the creation of the Tokugawa shogunate, he punished the daimyo lords who had fought against him by taking their lands and titles. To avoid this purge and maintain control of his territory, Nabeshima Katsushige (1580–1657) of Saga domain gave many precious Ming Chinese porcelains to the shogunate as tribute.
By the mid-1600s, however, the Manchus had invaded Ming China. As the war dragged on, it became difficult to acquire Chinese porcelain. Artisans in Arita had already started making porcelain and were selling it both domestically and to the Dutch in Dejima. Under pressure to continue sending tribute to the shogunate, the Nabeshima family had their potters in Arita try to create porcelains in the Chinese style. These efforts produced the first examples of Nabeshima ware.
Early Nabeshima ware, made in Arita in the 1650s, is characterized by large, decorated dishes. The complex and unique designs were intended to be exclusive to the Tokugawa family but were increasingly copied by other kilns in Arita and sold around the country. In the 1660s, the Nabeshima family moved their most talented craftspeople to the isolated village of Ōkawachiyama. They also built a checkpoint to control the only road that led in and out of the village, ensuring that they could protect the secrets of how Nabeshima ware was made.
The earliest pieces of Nabeshima ware from Ōkawachiyama are generally between 15 and 21 centimeters in diameter. They are characterized by a tall, patterned foot ring.
Golden Age to Late-Period Nabeshima Ware
The peak of Nabeshima ware production was in the late 1600s. The fifth shogun, Tokugawa Tsunayoshi (1646–1709), and his entourage of about 7,000 personnel regularly visited his daimyo lords at their manors in Edo (now Tokyo). Naturally, the shogun and his attendants could only be served the best food on the best dishes—Nabeshima ware. To meet the new demand for porcelain from his fellow daimyo, Nabeshima Mitsushige (1632–1700) issued a directive to the kilns in Ōkawachiyama: They were to employ only the best potters, create new designs for the shogun’s visits, and destroy any flawed pieces, no matter how insignificant its imperfections.
Unlike the commercial porcelain shipped from the port at Imari, Nabeshima ware patterns and designs were rigidly controlled. At the beginning of the eighteenth century, the shogunate revised its sumptuary laws to restrict annual tributes of porcelain decorated with colorful overglaze enamels. From then on, the Ōkawachiyama kilns could only use the government-approved hues of dark blue and celadon.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the style and quality of Nabeshima ware changed again. The Nabeshima family was required to support the creation of naval defenses in Nagasaki, and they were granted a five-year exemption from paying tribute to the shogunate. A small amount of Nabeshima ware was nonetheless made to be given as gifts. Porcelain from this period features less overglaze enamel and is less sophisticated than the works of the previous two centuries, reflecting the new burden on the Nabeshima family’s finances.
At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the shogunate was abolished, the domain system was ended, and the daimyo were removed from power. No longer able to make a living working for the Nabeshima kiln, many craftspeople left Ōkawachiyama to find work elsewhere. Fearing that traditional techniques would be lost, some of the remaining potters from the Nabeshima kiln started Seikōsha in 1877, but the organization was dissolved a few years later due to financial hardship. It was not until the early 1900s that the art and beauty of Nabeshima ware finally gained public recognition, when the improvement of transportation infrastructure connected Ōkawachiyama to the rest of the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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早期的鍋島燒
戰國名將德川家康(西元1543–1616)於西元1600年在關原之戰中獲得勝利,結束日本長達一個世紀以來的內戰。建立德川幕府的手段之一是嚴懲那些與他對抗過的大名,剝奪他們的土地與頭銜。為避免被消滅並維持領土的掌控權,佐賀藩的鍋島勝茂(西元1580–1657)向幕府進貢了許多珍貴的明代瓷器。
然而到了17世紀中葉,滿清入侵了明朝。隨著戰亂不斷,要取得中國瓷器變得相當困難。有田的工匠們已開始製作瓷器,並將其銷往國內以及出島的荷蘭人手中。在向幕府持續進貢的壓力下,鍋島氏促使其在有田的陶匠們嘗試創作中國風的瓷器。在其努力下催生了第一批的鍋島燒。
17世紀50年代在有田生產的早期鍋島燒具有大型、裝飾精美的餐盤之特點。這些精美而獨特的圖案原本是專屬於德川氏的,但越來越多有田地區的其他窯廠爭相仿製,並銷往全國各地。17世紀60年代,鍋島氏將他們最具天賦的工匠遷往與世隔絕的大川內山村落。此外還設立了一個檢查崗哨,控制進出村落的唯一通道,以確保鍋島燒的製作秘方不外洩。
大川內山最早製作出的鍋島燒作品直徑通常介於15公分到21公分之間。其特徵是底部有繪製圖案的圈足。
鍋島燒黃金時期至末期
鍋島燒的生產鼎盛時期是在17世紀末。第五代幕府將軍德川綱吉(西元1646–1709)及其約7,000名的隨扈會定期到訪江戶(今東京)地區大名們的莊園。將軍及其隨扈理當只能以最上等的食物和最好的餐具——鍋島燒來招待。為滿足其他大名們對瓷器的新需求,鍋島光茂(西元1632–1700)向大川內山窯廠下了一道命令:他們只能聘請最好的陶匠,為將軍的到訪提供新的陶器設計,並銷毀所有瑕疵品,那怕只是微不足道的一丁點瑕疵。
不同於伊萬里港運出的市售瓷器,鍋島燒的圖案與設計是受到嚴格管控的。18世紀初,幕府修訂了禁奢條款,限制每年進貢的彩釉瓷器量。自此,大川內山窯只能採用政府認可的深藍色與青瓷色調。
19世紀中葉,鍋島燒的風格與品質再次有了不同的面貌。鍋島氏依令須支援在長崎建立海軍防禦工事,並因此享有五年免向幕府進貢的特權。然而還是有少量鍋島燒生產用來當作贈品用。這個時期的瓷器特色是彩釉作品較少,作工也不如前兩個世紀的作品精細,反映了鍋島氏在經濟上前所未有的負擔。
19世紀末幕府遭廢除,也終止了藩屬制度,大名的權力就此被剝奪。因為無法再待在鍋島燒窯工作謀生,許多工匠離開了大川內山,到其他地方另謀出路。因擔心傳統工藝失傳,鍋島燒窯一些留下的陶匠於西元1877年創立了精工舎,但礙於經濟困境,該組織於多年後解散。直到20世紀初,隨著交通基礎設施的改善,大川內山與日本其他地區有了聯繫,鍋島燒的工藝與美學終於獲得大眾的肯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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早期锅岛烧
1600年,军事统帅德川家康(1543—1616)在关原之战中获胜,终结了日本长达百年的战国乱世。在创立德川幕府的过程中,德川家康通过剥夺领地和爵位的方式惩处了曾与他对抗的大名藩主(日本封建时代的地方领主)们。为躲避这场惩处并保全领地,佐贺藩的锅岛胜茂(1580—1657)向德川幕府进献了大量珍贵的明代中国瓷器。
然而至17世纪中叶,中国满清势力崛起,与明朝战事不断。随着战事的延续,锅岛家族求购新的中国瓷器变得愈发困难。当时,有田町的工匠早已开始烧制瓷器,并向日本国内及长崎出岛地区的荷兰商人销售。为维持向幕府进贡的传统,锅岛家族命令有田地区的陶工尝试仿制中国风格的瓷器,此举开创了锅岛烧的先河。
17世纪50年代诞生于有田的早期锅岛烧,以大型彩绘盘碟最具代表性。这种繁复独特的器形图案原本专供德川家族使用,但逐渐被有田地区其他窑场仿制并销往全日本。17世纪60年代,锅岛家族将最出色的工匠迁至与世隔绝的大川内山地区,并设立关卡,严格控制通往村庄的唯一道路,以此守护锅岛烧的烧制秘技。
大川内山生产的早期锅岛烧直径多在15至21厘米之间。其典型特征是圈足(陶器底座)高耸,并且图案丰富多样。
锅岛烧的黄金时代与晚期发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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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나베시마야키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일본의 오랜 내전의 세기를 종결시켰습니다. 도쿠가와 막부 탄생의 일환으로, 도쿠가와는 자신에게 맞선 다이묘 영주들의 영토와 작위를 빼앗음으로써 이들을 벌했습니다. 사가번의 나베시마 가쓰시게(1580–1657)는 숙청을 피하고 영토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도쿠가와 막부에 수많은 귀한 중국 명나라 자기를 공물로 바쳤습니다.
하지만 1600년대 중순경 만주족이 명나라에 침공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자 중국 자기를 입수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아리타의 장인들은 이미 자기 제작을 시작한 상태였으며, 국내뿐 아니라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에게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막부에 계속해서 공물을 바치라는 압박이 이어지자, 나베시마 가문은 아리타 도공들에게 중국식 자기를 만들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나베시마야키의 첫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1650년대 아리타에서 제작된 초기 나베시마야키는 크고 장식된 접시가 특징이었습니다. 복잡하고 독특한 디자인은 도쿠가와 가문만을 위해 제작된 것이었으나, 갈수록 아리타의 다른 가마들에서 이를 베끼기 시작하면서 전국 각지로 판매되었습니다. 1660년대, 나베시마 가문은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오카와치야마라는 외진 마을로 이주시켰습니다. 마을로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도로를 통제하기 위해 검문소를 세우기도 했는데, 이는 나베시마야키 제조 비법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오카와치야마에서 제작된 나베시마야키의 가장 초기작은 직경이 대체로 15~21cm입니다. 높고 문양이 들어간 굽이 특징입니다.
황금기~후기 나베시마야키
나베시마야키 생산이 절정에 달한 것은 160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1646–1709)와 약 7,000명의 수행원들은 에도(현 도쿄)에 있는 다이묘 영주들의 저택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했습니다. 쇼군과 수행원들은 자연스럽게 최고의 접시, 즉 나베시마야키에 최고의 음식을 대접받을 수 있었습니다. 동료 다이묘로부터 받은 신규 자기 수요를 달성하기 위해 나베시마 가쓰시게(1632–1700)는 오카와치야마에 있는 가마들에 지령을 내렸습니다. 이들은 최고의 도공만을 고용하여 쇼군 방문 시 바칠 새 디자인을 구상하고, 아주 작고 사소한 흠이라도 있는 작품은 처분해야 했습니다.
이마리항에서 출하되는 상업용 자기와 달리, 나베시마야키의 문양과 디자인은 엄격히 통제되었습니다. 18세기 초 무렵, 막부는 다채로운 덧그림으로 장식된 자기 연공(年貢)을 제한하기 위해 사치 단속령을 개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오카와치야마에 있는 가마들은 정부가 승인한 색인 감청색과 청자색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 나베시마야키의 양식과 속성이 한 번 더 달라졌습니다. 나베시마 가문은 나가사키의 해군 방어물 제작을 지원해야 했는데, 이로써 5년간 막부에 공물을 바쳐야 할 의무를 면제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량의 나베시마야키는 선물용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자기는 덧그림을 줄이고 지난 두 세기 동안 제작된 자기보다 기교가 덜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나베시마 가문이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19세기 말, 막부가 폐지되고 다이묘 체계가 막을 내리면서 다이묘들은 권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베시마 가마에서 일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게 된 수많은 장인들은 다른 곳으로 일자리를 찾으러 오카와치야마를 떠났습니다. 나베시마 가마의 남은 몇몇 도공은 전통 제조기법이 유지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1877년 세이코샤를 시작했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몇 년 후 문을 닫았습니다. 나베시마야키의 작품과 그 아름다움은 1900년대 초, 교통 인프라의 발전으로 오카와치야마가 일본 내 다른 지역과 연결될 수 있는 시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대중들에게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日本語
初期の鍋島焼
徳川家康(1543–1616)は、1600年の関ヶ原の戦いで勝利し、16世紀を通じて日本を苦しめていた長い戦乱の時代を終わらせました。徳川幕府の成立にあたり、家康は敵対した大名から領地や地位を没収しました。この粛清を避け、佐賀藩の領地を維持するため、鍋島勝茂(1580〜1657年)は、貴重な中国明朝の磁器を徳川幕府に献上しました。
しかし、17世紀半ばになると満州族による中国征服により、新しい磁器を入手することが難しくなっていきました。この時点で、有田の陶工たちはすでに磁器を作り始め、国内だけでなく出島のオランダ商人にも販売していました。幕府への献上を続けていく必要があったことから、鍋島家は有田の陶工に、幕府に献上していた輸入中国磁器の様式を模した磁器の制作を試みさせました。この努力が実を結び、鍋島焼の初期の作品が生み出されました。
初期の鍋島焼は1650年代に有田で作られ、大きな装飾皿が特徴です。複雑で独特な意匠は徳川家のためだけに考案されましたが、やがて有田の他の窯でも模倣され、全国で販売されることがありました。1660年代、鍋島家は最も優れた職人とその窯を、人里離れた大川内山の村へ移しました。また、村に通じる唯一の道に番所を設け、鍋島焼の製法の秘密を守れるようにしました。
大川内山で作られた鍋島焼の初期の作品は直径15〜21cmほどの皿が多く、文様が施された底部の高台が特徴的です。
鍋島焼の黄金期から晩期
17世紀後半は、鍋島焼の生産が最も盛んだった時期でした。第5代将軍・徳川綱吉(1646–1709)は、約7,000人にも及ぶ大規模な随行者とともに江戸(現在の東京)にある多くの大名屋敷を訪問しました。当然ながら将軍とその随行者には、最高の料理を最高の器でふるまうことが求められ、鍋島焼の必要性が高まりました。これに応えるため、鍋島光茂(1632–1700)は大川内山の窯に指示を出しました。その内容は、最高の陶工のみを使うこと、将軍訪問に合わせた新しい鍋島焼の意匠を作ること、どんなにわずかな欠陥でも見つかれば作品を破棄することでした。
伊万里から出荷されていた商業用磁器とは異なり、鍋島焼の意匠や文様は厳しくコントロールされていました。18世紀初頭、幕府によって制定された贅沢品に関する法令(倹約令)には、年間の献上品に鮮やかな色絵を施すことを制限する指示が含まれていました。これ以降、大川内山の窯では、幕府が認めた藍色や青磁色という限られた色のみを使用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
19世紀半ばになると、鍋島焼の様式や品質は再び変化しました。鍋島家は長崎の海防施設の建設支援を命じられ、その見返りとして幕府への年貢を5年間免除されました。鍋島焼の献上も免除となっておりましたが、贈答用としては生産が続けられていました。防衛という財政面の負担を受けて、この時期の作品には色絵が少なく、17〜18世紀の鍋島焼に比べて精巧さは低くなっています。
19世紀の終わり幕府がなくなり、廃藩置県によって藩制度が廃止され大名たちはその権力を失いました。鍋島窯で働くことで収入を得られなくなったことから、大川内山の多くの陶工たちは生計を立てるために村を離れ、他の土地で職を求めるようになりました。伝統技法が失われることを懸念した鍋島焼の残った陶工たちは1877年に「精功社」を設立しました。しかし、財政難により数年で経営不振となり解散しました。その後、20世紀初頭になって交通インフラの整備が進み、大川内山と国内各地が結ばれるようになった頃、鍋島焼は一般の人々にも広く知られ、高く評価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